우리가 묶은 집은 신부님의 동생인 오타비아노(Ottaviano Cipollone, 64세)씨의 집이다.
지로꼬 신부님이 태어난 생가이기도 하다.
그 집은 평소에는 빈 집이지만 여름 휴가철이 되면 부인과 내려와 마을에 있는 모든
친척들과 함께 보낸다고 한다. 집 앞은 바로 그 집 주인의 딸 부부가 살고 있지만 역시
평소에는 빈 집이라고 한다.

집은 이층으로 되어 있는데, 아래층은 부엌과 거실이 있고, 이층은 침실 세개와 화장실이
있다. 이층 방들은 모두 이중 창문으로 되어 있어서 이태리의 뜨거운 햇살을 완전히 차단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우리가 온다고 화장실이며 침실을 얼마나 깔끔하게 해 놓았는지
평소에 빈 집이라는 게 실감이 나질 않는다.

점심 식사는 처음에는 오믈렛, 그 다음은 감자와 닭고기를 곁들인 요리, 그리고 집에서
만든 모젤라또 치즈, 멜론과 곁들인 햄(역시 집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셀러드와 야채,
가지 볶음, 포도주와 함께 푸짐하게 차려졌다.
"보나 뻬띠~또(잘 먹겠습니다)."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고, 로마 시내로 와 다시 기차를 타고 온 피곤함이 우리를 맞이하는
분들의 따스한 정성으로 순식간에 다 녹아 버렸다.

오타비아노씨는 "이 포도주는 내가 직접 재배한 포도로 만든 건데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고 설명 해 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포도주 맛이 아주 순 한 것 같았다.
"이탈리아는 포도를 재배하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어요. 나도 큰 포도
농장을 가지고 있는데 그 곳에서 생산한 포도로 일년 내내 마실 포도주를 만들지요. 그리고
이렇게 모젤라또 치즈, 살라미도 만들고, 닭이며 돼지를 직접 키워서 모든 걸 공급하고 있다."라고
하는데, 모두 유기농인 셈이다.

바로 신부님 앞에서 포도주를 마시면서 공손하게 두 손으로 받아 옆으로 살짝 마시니까
신부님이나, 오타비아노씨가 모두 한 마디씩 한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항상 두 손으로 마십니까?"
"예, 어르신들 앞에서는 그게 예의예요."
"하하......, 우리는 그게 참 신기해요. 그냥 편하게 마셔요."
괜히 머쓱해 진다. 그래도 신부님과 마주 앉아 한 손으로 그냥 마시려니까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은 없어지지 않는다.

서양에서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친구가 될 수가 있고, 함께 동등하게 대할 수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오뉴월 하루 햇살이 어딘데?"라고 하며 좀 따지는 편이다. 잘못된 습관이건
좋은 습관이던 문화 차이에서 오는 건 있지만, 그래도 어르신들 앞에서는 예의를 갖추는
습관은 좋은 것 같다.

나는 음식을 좀 늦게 먹는 편인데, 신부님과 오타비아노씨는 그래도 너무 빨리 접시를 비우신다.
오타비아노씨는 "나는 해군에 있었기 때문에 배가 흔들려서 빨리 먹는 버릇이 있어요."
신부님은 "이디오피아에서는 음식을 앞에 놓고 여럿이 함께 먹는데, 항상 음식이 귀하고
모자라기 때문에 모두들 빨리 먹어요. 그러니 천천히 많이 드세요."라고 말씀 하신다.

식사를 하면서 로돌프 신부님은 그 마을의 유래에 대해 말씀 해 주셨다.
"2차 세계대전 때, 중국에서 온 신부님께서 독일군에게 잡혀 아베자노근처의 수용소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는 날, 그 수용소가 미군의 폭격을 받았고, 그 때 신부님은 극적으로
탈출을 했어요. 그리고 큰 산을 넘어 이 마을로 오게 되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락 방에
숨기고, 독일군 몰래 보호해 드렸어요. 전쟁이 끝나고 그 중국 신부님에게 마을 사람들과
우리 가족은 모두 교리를 받았고, 나의 가장 큰 형님과 둘째 형님,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모두 다 신부가 되어 큰 형님은 소임지가 한국이었는데, 병이 들어 가지 못하고 대신 둘째
형님이 한국으로 가게 된 동기가 되었어요. 나는 첫 사제가 되어 에디오피아로 가서
지금까지 40년이 넘게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을 하고 있어요."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가슴이 쨘해진다. 한창 의욕이 차 있을 젊은 시절부터 70대가
넘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한 로돌프 신부님의 일생은 너무나
숭고하기만 하다. 또한 지로꼬 신부님 역시 한국이 어려웠던 시대에 오셔서 '성모의 기사회'
초대 신부로서 한국 천주교 역사상 또 한 획을 그으셨으니,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에서 그 먼
이태리까지 와서 목숨을 걸고 선교활동을 한 중국 신부님이 두 분 신부님의 일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되는 사람, 누군가의 일생에 지표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내 자신부터 온전하게 하느님께 순명하고, 십자가를 기꺼이 껴안고 가는 자만이 가능할 것이다.

식사 후, 청포도와 복숭아가 나왔는데 포도는 알이 크고 무척 달다. 그리고 모두들 진한 커피인
에스프레소(Espresso)커피를 마시는데, 향과 맛이 진하고 양이 적은 이탈리아식 커피이다.
한 번 마셔보려고 했더니 어찌나 쓰고 진한지 도저히 마시질 못했다.

이태리는 여름 햇살이 너무 강한 것 같다.
집에서 조금 쉬었다가 신부님의 조카 사위인 프랑코, 오타비아노씨와 함께 근처의 알바 프첸스
(Alba Fucens)에 있는 로마 유적지로 갔다. 두 꼬마가 동행을 했는데 프랑코의 아들인
엘리야(Elia)와 그 여자 친구인 키아라(Chiara)이다.
둘은 아주 어려서부터 그 마을에서 함께 자랐다는데, 늘 붙어 다녀서 처음에는 둘이 남매인줄
알았다. 엘리야가 한국말로 "잘 먹겠습니다."를 어떻게 말 하느냐고 해서 가르쳐 주었더니
무엇을 먹을 때마다 "잘 먹겠습니다."라고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한다.

어떤 외국어를 배울 때, 그렇게 말 배우는 식으로 배우다보면 훨씬 더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이태리어를 배워 그 다음에 써 보려고 하면 단어가 입에서 맴돌뿐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젊었을 때 영어라도 배워 놓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란 자책이
든다.

난 썬 크림도 바르지 않고, 화장도 하지 않고 맨 얼굴로 다니니 눈이 부시고, 얼굴은 금방
새카매졌다. 그래도 어쩌랴. 그대로 다닐 수 밖에......,
그 곳은 약 2천년전의 로마 유적지 인데 아직도 발굴팀이 발굴을 하고 있었다.
유적지 입구에 나 있는 돌은 단단해 보이는데도 바퀴자욱이 선명하고 움푹 패어져 있다.
열심히 설명을 해 주는 프랑코의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가끔씩 건훈이가
통역을 해 주었는데 "노예들이 큰 돌들을 나르는 짐차를 끌 때 패인 자욱"들이라고 한다.

로마 시내에 있는 유명한 콜롯세움 경기장도 있지만 그 곳에도 원형경기장이 있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그 경기장 역시 동물들을 풀어놓고, 노예들과 싸움을 시켰던 곳이라고 한다.

"어째 로마는 큰 도시 작은 시골 마을 할 것 없이 이런 경기장을 만들어 놓고, 노예와 사나운
동물들을 싸우게 하면서 그 잔인한 광경을 즐기는지 모르겠어."라고 하니 건훈이는
"그러게 말이예요. 그래도 유적지를 둘러보니 그 시대에 이미 수도 시설도 만들어 놓고,
상점도 있고, 부엌에는 물을 잘 흐르게 배수구도 해 놓고, 이렇게 큰 돌을 �グ� 기둥을 세우고,
집을 지은 걸 보면 대단해요."라고 한다.
그 유적지는 워낙 작은 시골 마을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도 별로 없고 무척 조용했다.
고즈녁한 저녁 햇살을 뒤로하고 마을로 돌아오니 이틀 후에 있을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신부님의 조카 사위인 프랑코는 체세 근처있는 자동차 매매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영어를 아주 잘 했다.
우리 일행은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신부님의 여동생 집으로 갔다.
제법 넓은 공터에는 방울토마토와 포도, 호박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집 안에는 한국 사랑이 듬뿍 묻어 난다.
여기저기 한국의 박 공예품, 자개로 만든 물건들, 앙증맛은 작은 꽃 고무신.......,
신부님의 여동생은
"그 한국 인형을 들어서 밑을 보세요. 어떤 글씨가 써 있지요? 바로 그 신랑 각시 이름이
우리 이름이지요."라며 함박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나무로 만든 신랑 각시 인형 밑에는 두 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신부님께서는 영어와 이태리어, 에디오피아어를 모두 잘 하시니까, 우리에게 통역을 해 주면
건훈이가 또 설명을 해 주고......., 언어는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하나로 통하고, 신부님의
여동생 부부, 조카사위 프랑코부부, 자녀들, 그리고 남동생인 오타비아노 부부, 마을 사람들......,
모두 따스한 미소와 깊은 사랑으로 우리를 만나고, 대해 주었다.

* 위의 사진은 신부님의 남동생인 오타미아노씨
* 아래 사진은 신부님 여동생 댁의 작은 텃밭, 로돌프 신부님과 동생인 오타비아노씨의
뒷 모습이 보인다.